#1. 교육의 현장에 있는 교육자, 사역자들의 고충, ‘갈수록 가르치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육자들의 사명감이나, 사역자들의 소명감이 무력할 만큼 교육의 현장과 여건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교육의 환경이 척박해지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갈수록 교육의 환경은 그야말로 척박하다 못해 황폐화의 일로에 놓여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미국의 미시간 대학 잉글 하트 교수는 그의 저서 ‘세계문화와 변동론’에서 지난 50년간 세계 각국의 가치관 변화에 대한 변화를 조사한 결과, 미국과 유럽은 20~25% 정도가 변화하였고, 중국은 30%, 러시아가 상당히 높은 45%선, 아프리카 중에서 알제리는 5%미만으로 가장 적게 변화되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70%이상이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높은 변화율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족관계와 사회제도와 풍습과 문화, 그리고 학교 교육전반에 대한 가치관이 해방 직후에 비하여 엄청나게 변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급속도로 추락한 우리 가치관의 변화를 두고 “한국의 가치관은 변화된 것이 아니라 가치관이 아예 몰락한 나라이다.”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정신세계와 문화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무너져 지붕이 땅바닥에 내려앉아 사람이 살수 없는 흉칙한 폐가로 변해버린 그 자체입니다.
오늘날 교육이 제대로 될 수 없는 것은 지금 우리의 세대와 다음세대의 보편적인 가치관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인 것 입니다.
#2. 지난 50년 동안 우리사회의 가치관이 이렇게까지 몰락했다니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사회에 다음세대들로 통해서 불거지고 있는 문제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이 문제의 원인과 분석을 통한 대안을 제시하려면 먼저 ‘문화와 종교교육’의 기독교 교육학의 한 논문의 이론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이론은 쉐마교육 원장이시며 쉐마학회의 회장이신 현용수 박사님께서 발견하신 것으로 기독교 교육과 다음세대 교육의 승패는 이 이론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이 이론에 맞는 교육의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교육을 하느냐에 따라 교육의 결과와 양상은 극과 극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문화이론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첫번째 수직문화는 심연, 뿌리 문화라고 하는 지혜교육을 말하는데 이것은 인문학적인 영역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하는 교육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종교, 철학, 역사, 효도, 전통, 윤리, 도덕으로 이 수직문화는 인간의 내면, 즉 그릇의 크기와 깊이를 이루게 하여 인간 됨됨이를 교육하는 것으로 EQ교육을 말하는데, 지난 50년 동안 우리 사회는 이 지혜교육을 송두리째 없애버린 결과입니다. 인간화교육 즉, 인성교육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평문화는 현대학문을 중심으로 하는 지식교육입니다. 이는 인생의 의미보다는 재미, 흥미, 쾌락, 물질만능, 성공지상주의를 조장하는 교육으로 물질과 명예, 권력, 유행, 유행가, 가공식품 문화로 현대학문과 과학이 중심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하는 지혜교육은 없어지고 오로지 세상적인 지식교육의 경쟁교육의 구조가 다음세대의 교육을 무너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추이를 살펴보면 수평문화인 대중문화가 강할수록 기독교교육에서는 대중문화의 형식을 무분별하게 수용했습니다. 재미와 복음을 함께 간다는 논리였습니다. 즉 복음이 맘몬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가치관, 문화를 끌어오면서 용어만 바꾸어 사용했고 기독교 교육의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기독인들이 표현되는 것은 세상적인 문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형상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아무리 그 속에 복음이 있다 할지라도 표현되는 것은 수평문화요 대중문화에 잠식되어 버린 것입니다.
#3. 요즘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대중문화를 친구들과 의사소통의 코드로 삼고 있잖습니까? 대중문화를 모르면 소외시키는 분위기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데 잘못하다가 다음세대들이 또래나 친구집단에서 겉돌게 될지는 않을까 염려합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정반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나를 희생시키는 경향이 많습니다. 친구가 나를 멀리하고 친구나 또래문화에서 집단적으로 나를 소외시킬 것을 염려해서 세상적인 문화에 쉽게 타협하고 있습니다. 친구를 사기 위해 신앙과 영혼을 파는 격입니다. 그 결과 신앙이 망가지고, 인성이 망가지는 문화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초등학생 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에 진학하면 신앙의 퇴색이 오고 믿음의 배교자가 부지기수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 잘못 만나 착한 아이가 잘못되었다고 하소연 하는 내용이 자녀신앙상담의 내용이 주류라고 합니다. 저는 이것을 그들의 신앙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들의 인성교육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기독교교육을 엄밀히 따지면 내가 그들의 문화 속에서 들어가서 동화되거나 잠식당하는 정도의 교육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이들의 문화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착한 행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의 기본입니다.
지금 당장의 친구를 교회로 인도하는 것도 중요하거니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표출할 수 있는 교육이 나의 가치와 문화 속으로 나의 친구들이 흡수할 수 있는 교육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기독인의 다음세대가 비기독인을 친구삼기 위해서 그들의 세상적인 가치와 문화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즉 비기독인들이 기독인과 친구가 되기 위해서 구별되고 바른 가치와 문화 속으로 빨려 들어오게 하는 것 이것이 전도의 효과입니다.
왜 기독인들은 약해야 하는가요? 왜 패잔병으로 들어와야 거룩한 사람이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으로 치켜세웁니까? 상처투성이가 많은 것이 십자가의 흔적입니까?
강하고 담대하라, 네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의 다음세대가 어떤 경우라도, 환경에도 강해야 하고, 담대하도록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4. 우리의 다음세대가 강하고 담대하기 위한 교육의 최적기는 언제일까요?
강하고 담대한 교육이 되려면 앞서 말씀드렸던 수직문화교육 즉, 역사, 종교, 철학, 전통, 도덕, 윤리 인생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교육이 왜 중요한지를 이해시키고 반복적인 교육을 해야 하고요. 수평문화가 다음세대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를 알게 하여 부모는 수평문화를 차단시켜주고 다음세대는 스스로가 거부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마땅한 일이라면 13세 이전에 해야 합니다. 13세 이전의 반복적인 교육은 일생동안 지워지지 않습니다.
[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것은 주전 605년 첫번째 침공 때였습니다.
포로로 붙잡혀온 인재들을 바벨론에서는 바벨론 교육을 받게 하여 관리로 등용했다고 합니다. 나라를 빼앗긴 포로의 신세는 참으로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볼 때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들의 왕궁학교의 특례입학은 행운중의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출세 길이 보장되고,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최소한의 차별대우는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지위와 부를 한꺼번에 잡았습니다.
그들에겐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왕이 먹는 산해진미를 왕립학교에 있는 학생들에게도 먹을 수 있도록 하여는 것은 최고의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문제는 산해진미입니다. 바벨론의 우상 앞에 바쳤던 음식을 걷어다가 왕립학교에 있는 학생들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먹는 것이 신앙에 무슨 대숩니까?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먹든지 신앙과 하등의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문제 중 문제로 보는 것은 그는 선민이기 때문입니다. 왜 선민은 우상의 제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누가 이것을 감히 거부할 수 있을까요? 거부하는 순간 모든 특권, 혜택이 순간이 날아가는데요.
다니엘은 결단합니다. “나는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이때의 나이가 얼만지 아십니까? 16~17세로 추정합니다. 이 나이는 현재 중학생연령입니다.
중학생 나이에 세상의 출세보다 명예보다 재미보다 자신의 거룩을 지키겠다는 것은 아무나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니엘의 이런 거룩을 향한 결단과 행동이 바벨론의 지도자로 하나님이 올려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우리의 다음세대가 제2의 다니엘이 많이 배출되도록 우리 기성세대는 열심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